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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 클린턴/생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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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편집]
제42대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의 생애를 서술한 문서이다
2. 생애[편집]
1946년 8월 19일 줄리아 체스터 병원에서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3세(William Jefferson Blythe III)라는 이름으로 태어났다. 중장비 판매원이던 아버지 윌리엄 제퍼슨 블라이드 2세(1918~1946)는 클린턴이 태어나기 3개월 전 미주리주 고속도로에서 사고로 요절하게 된다.[1] 블라이드가 4살이 되던 해에 어머니 버지니아 캐시디(Virginia Cassidy, 1923~1994)는 자동차 판매상인 로저 클린턴 시니어(Roger Clinton Sr., 1908~1967)와 재혼하고, 블라이드가 15살이 되던 해에 성을 계부의 성인 클린턴으로 바꾸게 된다. 정식 이름은 윌리엄[2] 인데, 그보다 애칭인 빌이 더 유명해 대개 '빌 클린턴'이라고 불린다.[3]
계부는 술에 취하면 아내와 아들을 폭행했기 때문에 어머니와 이부동생을 보호해야 했던 클린턴은 나이에 비해 조숙하게 자랐다고 한다. 어린 시절의 상당수를 범죄와 폭력이 들끓는 핫스프링스에서 불우하게 보냈고, 끼니를 햄버거 등 패스트푸드로 때웠는데 입맛이 들려서 건강에 신경쓰기 이전까지 패스트푸드를 즐겨먹었다. 고등학교 시절엔 정치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마약에 관한 일화가 하나 있는데, 첫 번째 대선 운동 시절 비치료용 약물[4] 을 해본 적이 있냐는 질문이 들어왔을 때의 대답이 압권이다. 클린턴은 "연방이나 주의 마약 금지법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하지만 나중에는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에 재학 중일 때 마리화나를 피워본 적이 있다고 시인했다.[5] 영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웠으니 미국의 마약금지법을 어기지 않은 것은 맞다. 이 발언은 후술하는 '부적절한 관계'와 더불어 그의 교묘한 화술을 이야기할 때 필수적으로 인용된다. 당연히 마리화나 문제는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고 계속 이어졌다. 이에 빌 클린턴은 입에 물긴 했지만 몸에 맞지 않아서 빨지는 않았다고 대답했다. 그의 경쟁자였던 제리 브라운마저도 그저 사소한 문제라며 이 부분만큼은 클린턴을 감쌌으나, 마리화나 문제는 한동안 빌 클린턴의 '자질' 문제를 제기하며 들썩였다.
어찌 보면 아메리칸 드림, 계층적으로 볼 땐 개천에서 용난다의 상징과도 같은 인물이다. 가난한 어머니와, 폭력적인 의붓 아버지 슬하, 그리고 우범지대 '핫 스프링스'에서 자라 비싼 미국 대학교 학비를 낼 수 없는 환경이었으나 세계 최고의 명성을 자랑하는 조지타운대학교 외교정치학과, 옥스퍼드대학교, 예일대학교 로스쿨을 꾸준히 장학금을 받으며 다닌 끝에 미국 대통령이 되었으니 말이다.
청소년 시절 모습.
조지타운 대학교를 다니고 로즈 장학생[6] 으로 선발되어 옥스퍼드 대학교 유학을 거쳐서[7] 예일 대학교의 로스쿨을 졸업했다.[8] 예일대 로스쿨 재학 시절 힐러리 로댐을 만나 1975년에 결혼하고 1980년에 딸 첼시를 두었다.
위 사진은 1975년 11월 촬영된 빌과 힐러리의 신혼 시절이다.
이들을 엮어준 것은 베트남 전쟁으로, 힐러리는 그 전까지만 해도 린든 B. 존슨에 대항한 공화당 소속 배리 골드워터의 지지자였다.
조지타운 대학교 재학 중에는 아칸소 상원의원실에서 서기를 지냈고 예일 로스쿨을 졸업한 후 아칸소로 돌아와 아칸소 대학교 로스쿨 교수를 지냈다.
2.1. 정치 입문[편집]
1974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아칸소 연방 하원 선거에 출마해 현직인 존 폴 해머슈미츠와 맞붙었다. 워터게이트 사건으로 다소 유리해진 정세에도 불구하고 4% 가량 차이로 낙선하였다.
2년 후 민주당 소속으로 아칸소 검찰총장에 수월하게 선출되였고 1978년에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었다.[9] 주지사 때는 교육정책과 여성, 흑인 등용 정책으로 인기를 얻었다. 다시 한번 말하자면 빌 클린턴은 아메리칸 드림의 상징적인 인물이기도 한 것이, 그가 맨 처음 주지사로 선출됐을 때가 32살이었다. 그는 당시 미국 주지사 중 가장 어린 주지사였으며 역사상 어린 나이에 주지사가 된 인물 중 한 명이다.[10] 아칸소는 미국에서 작은 주이기 때문에 1992년까지도 클린턴의 인지도는 대단히 낮았다. 그러나 경선 당시 1988년도의 지루한 대선 지지 연설의 이미지를 일신한 클린턴은 컴백 키드(Comeback Kid, 돌아온 꼬마)라는 별명을 얻었다.
민주당 내부에서는 이미 1990년대 들어서면서부터 클린턴을 유력한 대선 후보로 점찍었고, 1992년 대선에 그가 출마할지도 모른다는 추측이 있었다. 하지만 클린턴은 주지사 임기를 채우겠다는 공약을 했고, 걸프전 승리로 엄청나게 치솟은 부시의 인기 때문에 승산이 없다고 판단하여 대선에 출마하지 않겠다는 뜻을 비추었다. 아칸소 주에서 그의 출마를 지지하는 여론은 39%에 지나지 않았고 부시가 한 번 더 했으면 좋겠다는 여론은 52%에 달했다. 그를 주지사로 뽑은 아칸소 주가 그 정도였으니 클린턴이 출마를 망설이는 것은 당연했다.
하지만 백악관의 저명한 공화당 인사 로저 포터가 전화 통화에서 클린턴에게 "만약 당신이 출마한다면, 당신이 현재 민주당에서 우리에게 가장 위협적인 적수인 고로 당신을 (마이클 듀카키스에게 했던 것처럼) 개인적으로 파멸시킬 수밖에 없다."라며 위협했다.[11] 그러자 그때까지 출마를 망설이던 클린턴은 격노하여 "충고 고맙다. 덕분에 출마하기로 했다."고 쏘아붙였다. 이에 로저 포터는 "만약 당신이 1996년 대선에 나온다면 대통령이 될 수 있겠지만 이번 대선에 나온다면 파멸할 것이고 정치 생명도 끝날 것이오."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었다고 한다. 결국 클린턴은 힐러리와 논의한 끝에 출마하기로 마음을 굳혔다.
그는 전당대회에서 아이오와 상원의원인 팀 하킨 등을 제치고 승리하여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선출되었다. 그가 영국에서 마리화나를 피운 적이 있다는 사실 등이 지적되었지만 큰 문제는 되지 않았다. 사실 그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병역 문제였는데, 그가 베트남 전쟁에 반대했다는 것과 베트남 전쟁에 참전하지 않기 위해 일부러 영국 옥스퍼드 대학에 도피성 유학을 했다는 혐의가 가해지면서 미국의 퇴역군인을 비롯한 보수층의 맹렬한 공격에 시달렸고 부시는 "내가 태평양 전쟁에서 총알을 물고 있을 동안 클린턴은 영국에서 손톱을 물고 있었다!"라며 맹공을 펼쳤다.[12] 거기에 제시 잭슨 같은 급진 진보 성향의 유권자들도 클린턴을 위협했고[13] "컴백 키드"는 그렇게 잠시 위기에 몰렸다. 말년의 리처드 닉슨은 의기양양하게 '부시가 재선할 것이고 로스 페로가 2위쯤 할 것이며 클린턴이 참패할 것'이라고 주장했고 여론은 제법 흔들렸다.
그러나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대통령이었던 조지 H. W. 부시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려다 발생시킨 불경기로 당황하고 있었고 그런 상황에서 "문제는 경제야, 이 바보야!(It's the economy, stupid!)"라는 역사에 남을 선거 문구를 내세워 370명의 선거인단을 휩쓸며 43%의 득표율을 올려 42대 대통령으로 당선된다. 여하간 이 문구의 가장 대단한 점은 '냉전의 시대는 가고 경제 전쟁의 시대가 왔다.'는 것을 단 네 단어로 압축했다는 점이다.[14][15] 클린턴은 12년 만에 공화당 집권을 저지하고 여유있게 승리했다.
로스 페로는 불출마를 번복하여 양당 후보의 뒤통수를 쳤고, 민주당 경선 과정도 초반에는 클린턴이 겨우 3위를 할 정도로 암담한 상황이었지만 정공법과 꼼수를 모두 적절히 활용해 가며 이를 돌파했다. 여기에는 '미국 역사상 가장 멍청한 부통령일지도 모른다'는 이야기가 돌았던 댄 퀘일[16] 과 반대로 '미국 역사상 가장 똑똑한 부통령 후보'라는 이야기가 돌았던 앨 고어라는 부통령 후보들의 격차도 작용했다. 실제로 앨 고어를 부통령으로 올린 다음에 지지율이 꽤 많이 상승했고, 차라리 앨 고어가 대통령이 되는 것이 낫지 않냐는 이야기까지 돌았다. 게다가 부시가 1988년 선거에서 답습했던 네거티브 위주의 선거를 치러 유권자들을 질리게 하기도 했다. 어쨌든 클린턴은 매우 힘겹게 선거에서 이겼다.[17]
2.2. 대통령 당선 이후[편집]
2.2.1. 내정[편집]
당선되자 마자 미국 경제의 악의 축이었던 쌍둥이 적자, 즉 재정 적자와 무역 적자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가지 조치를 개시했다. 우선 재정적자를 줄이기 위해 정부기관의 상당 부분을 전자화해 공무원 30만 명을 해고했다. 또 레이건 정부 이후부터 계속 이어져 왔던 감세정책을 폐기하고 누진세를 확대해 재정 수입을 늘렸다. 빌 클린턴의 첫번째 재정 법안은 민주당이 다수당이던 1기 전반기에도 하원에서 218:216, 상원에서 50:50으로 갈렸다가 앨 고어가 찬성표를 행사해 가까스로 통과했다.
또한 재임 직후 북미자유무역협정을 체결했고, 부시 행정부 때 폐기되었던 미국 통상법 301조를 부활시켜 거의 모든 국가의 무역, 관세장벽을 무너뜨리고, 우루과이 라운드 체제를 통해 농산물, 서비스, 엔터테인먼트 사업 부분의 시장개방을 강제해 미국 산업의 시장 확대를 통한 무역적자 해소를 꾀했다. 또 미래산업으로서 IT, 금융산업을 중점적으로 육성했다. 이러한 정책으로 마이크로소프트 주도의 IT 산업, 월트 디즈니 컴퍼니의 오락산업 등 첨단산업이 크게 발전했으며 앨런 그린스펀 위원장을 필두로 한 연방준비제도 주도의 경제개혁도 성과를 보여 정부 재정이 흑자로 전환되고 미국 국내 경기가 클린턴의 임기 내내 호황을 이어갔으며, 1970년대 이후로 미국의 고질적인 사회문제로 손꼽혔고, 로널드 레이건과 조지 부시도 막강한 경찰력을 투입하고 교도소 수감자수를 크게 늘려놓아도 해결되지 않던 치안문제도 빌 클린턴 시절부터 개선되기 시작했다.[18] 허나 갑작스런 시장개방으로 인해 많은 손해를 보아야 했던 여타 국가들(특히 동아시아 지역)의 반미감정을 촉발시키는 원인이 되었다.
물론 좋은 일만 있었던 것은 아니고, 아내 힐러리의 주도하에 야심차게 추진했던 대형 프로젝트인 국민의료보험 도입이 결국 좌초하고[19] 인기가 곤두박질쳐, 1994년 중간선거에서 대패해 상하원을 공화당에게 전부 내주게 된다.[20] 뒤이어 벌어진 오클라호마 연방청사 폭탄테러사건을 신속히 해결하면서 인기를 회복했지만 그 뒤로도 여러가지 스캔들 때문에 고생했다.
그래도 첫번째 임기 당시 클린턴은 높은 경제적 성과를 토대로 47,401,185표(49.2%), 선거인단 수 379명을 얻으면서 당시 공화당 대통령 후보였던 73세 고령의 밥 돌 상원의원에 압승을 거두고 1996년 연임에 성공했다. 화이트워터 사를 통한 부동산 투기 의혹(일명 '화이트게이트')으로 공화당이 공격하고 있었고, 지퍼게이트 외에도 주지사 시절의 여자 관계 의혹으로 많은 공격을 받았다. 참고로 르윈스키 스캔들이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98년 1월로, 클린턴이 이미 연임에 성공한 뒤였고, 르윈스키 스캔들이 1998년 중간선거에 끼친 영향도 크지 않아서 오히려 민주당이 1998년 중간선거에서 제법 선전했다.
두번째 임기 막판에는 동생 로저 클린턴과 마크 리치로 대표되는 자신의 후원자들을 사면하여 의회에서 퇴임 이후 청문회가 벌어지는 등 그렇게 깨끗하다고 보기는 어려운 임기를 보냈다. # 이 때문에 비교적 괜찮고 좋은 분위기의 집안에서 자란 준수한 이미지의 조지 부시의 당선에 어느 정도는 영향을 끼쳤다는 평가도 있다. 물론 미국인들은 그뒤 이미지와 유능함이 무조건 일치하지는 않는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닫고 2000년대 내내 한숨을 푹푹 쉬어야 했다.
2.2.2. 외교[편집]
우파로부터 제기되는 비판으로는, 클린턴이 급부상하는 중국을 포섭하는데 너무 열정적이었으며 러시아의 부패와 파벌주의에 눈을 감았으며 유고슬라비아나 이라크같은 국가들을 상대로 무력을 사용하는데 너무 느렸다는 것이 있다. 반대로 좌파와 자유주의자들은 르완다에서의 인종학살을 막는데 클린턴이 실패한 것과 발칸 반도의 유혈사태에서 너무 느렸던 것과 강력해진 국제기구에 기반한 다자간 세계질서를 구축하겠다는 임기초 약속을 저버린 것을 한탄한다. 심지어 실용적인 중도주의자들조차 클린턴의 빈약한 외교정책이 소수민족의 로비활동과 대중 여론조사, 그리고 미디어의 반응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사교 활동"과 같았다고 지적한다.
(중략)
클린턴 정부 치하에서 미국은 바르샤바 조약기구의 과거 구성국이었던 3개국(폴란드, 체코, 헝가리)을 동맹으로 끌고 옴으로써 냉전의 승리를 굳건히 했다. 급부상하는 중국이 가진 미국에 대한 호감을 그대로 유지시키면서도 동아시아에서 동맹의 기반을 마련하면고 중국의 잠재적 경쟁자를 준비시켰다. 미국은 유럽과 동아시아의 동맹을 이끌면서 동맹들에게 더 큰 부담을 전가시켰다. 그리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승인 없이도 NATO 동맹국과 함께 타국의 주권 영토에까지 개입할 권리를 주장하였다. 클린턴은 미국의 정책을 "세계 질서"와 국제공동체의 보편 이익으로 포장하였을지 모르나, 그 핵심은 여전히 미국의 국력을 일방적으로 투사하는데 있다[21]
- 클린턴의 외교 정책에 대한 두 가지 격려(Two Cheers for Clinton's Foreign Policy), Foreign Affairs 79#2 (2000)#,
- 스티븐 마틴 월트(Stephen Martin Walt)[22]
, 하버드 대학교 케네디 스쿨 국제 문제 교수
- 한때의 적국이었던 베트남과 오랜 적대 관계를 해소하고 수교하였다. 또한 베트남전 당시 사망 또는 실종된 미군 장병의 수색과 유해 송환에도 베트남에 협조를 구하였다.
- 아이티의 좌파 대통령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가 군사 쿠테타로 실각하자 빌 클린턴 행정부는 미국 국내의 개입 반대여론을 무릅쓰고 아이티 군사정부를 상대로 공습을 하겠다는 위협을 함과 동시에 지미 카터 전 대통령을 특사로 파견하는 등으로 아리스티드를 복권시키려고 노력하였다. 그 배경에는 당시 빌 클린턴의 지지세력에서 가장 커다란 비중을 차지하던 민주당내 흑인 의원들의 요구가 있었다고 전해진다. 클린턴의 이런 노력 결과 아이티 군사정부는 권력을 포기하였고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복귀하였다. 다만 이는 임시방편일뿐이어서 2004년 다시 군사 쿠테타가 발생하였고 장 베르트랑 아리스티드는 다시 실각하였다.
- 팔레스타인 자치와 이스라엘군 철수 등의 항목으로 구성된 오슬로 협정(Oslo Accords)의 체결을 팔레스타인과 이스라엘 사이에서 주도하였다. 다만 이 협정은 협정 내용에 불만을 품은 과격분자가 이스라엘 라빈 총리 암살을 일으키는 등 구체적으로 빛을 보지는 못했다.
- 부다페스트 안전 보장 각서 - 1994년 우크라이나, 벨라루스, 카자흐스탄이 구 소련의 핵무기를 포기하는 대가로 해당 국가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내용의 각서를 러시아, 영국과 함께 체결하였다. 이 각서는 한때 성공적 비핵화의 사례로 자주 언급되었다.
- 소말리아 - 영화 블랙 호크 다운으로도 제작된 모가디슈 전투에서 미군 19명이 사망하는 피해를 입자 빌 클린턴 행정부는 소말리아 내전에서 손을 떼버렸다. 그리고 이때의 트라우마때문에 빌 클린턴 행정부는 르완다 내전이나 보스니아 전쟁 등 제3세계에서의 분쟁에서도 방관 내지는 소극적인 외교정책으로 일관하였고 이는 결국 수십, 수백만이 학살되는 비극으로 연결되었다.
- 르완다 - 르완다 내전 당시 르완다 및 세계의 구호 기구들이 미국 정부 및 유엔의 개입을 요청했으나 미국은 철저한 방관자적 태도로 일관했고 다른 서방국가 역시 미국의 눈치를 보면서 방관했다. 그리고 그 결과 르완다 인구의 약 20%, 총 80만명이 학살당했다. 빌 클린턴마저도 르완다 학살을 본인 최악의 실패로 인정했을 정도#.
- 보스니아 전쟁 - 1992년부터 1995년까지 현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에서 발생한 민족주의 세력간 분쟁에서 빌 클린턴 행정부는 약간의 제재 외에는 거의 방치에 가까운 모습으로 해당 사태에 개입하지 않았다. 사실 빌 클린턴이 처음부터 이렇게 방치정책으로 나간 것은 아니었다. 1992년 보스니아 전쟁 초기 당시 미국이 구상했던 전략은 '해제후 공격(Lift and strike)#'였다. 보스니아 대통령에 의하여 제안된 이 전략은 1991년에 발효된 발칸반도 무기 금수조치, 즉, UN 안보리 결의안 713호(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 Resolution 713)를 해제(Lift)하여 무력이 상대적으로 빈약한 보슈냐크인에게 첨단 미군 무기를 지원하는 것으로 그들의 무력을 증가시켜 세르비아인에 대항하자(strike)는 전략이었다. 1991년 당시 유고슬라비아 전쟁의 전운이 피어오르자 UN 안보리는 이 지역의 전쟁을 막기 위하여 발칸 반도내로의 추가 무기 유입을 막았는데 이는 시간이 지나자 무기없이 맨손이었던 보슈냐크인에 대비하여 정교회 슬라브 문화권의 후원을 받고 있었던 세르비아군의 화력이 압도적으로 유리해지는 결과를 가져왔기 때문이다. Lift and Strike 전략은 당시 민주당 상원의원인 조 바이든도 동의하는 등 실현 가능성이 높았으나 부시가 재선에 실패하면서 공은 빌 클린턴에게 넘어갔다. 이후 빌 클린턴도 Lift and Strike 전략을 수용하여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를 유럽에 보내 협조를 구했는데 놀랍게도 당시 유럽 수반들의 여론은 매우 나빴다고 한다.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러시아 전부 해당 제안을 거부했으며 특히 러시아는 보스니아 당사자들간의 일일뿐이니 자기들끼리 협상을 하도록 제3자는 방해하지 말고 내버려 두라고 미국에게 역으로 제안하였다.
미국 내에서도 베트남 전쟁의 악몽 때문에 개입을 거부하는 목소리가 많았다. 국내와 해외의 반대에 부딪힌 빌 클린턴은 결국 Lift and Strike 전략을 포기했고 그 사이에 세르비아군은 무기 금수 조치에도 아랑곳하지않고 '어디서'로부터 각종 중화기를 가져와 보스니아에서 일방적인 인종학살이 벌이고 만 것이다.
이 전쟁으로 인하여 약 30만명이 사망하였는데 그 중 상당수는 전투가 아닌 '인종청소'라는 이름의 민간인 학살로 발생한 것이다. 전쟁의 피해는 초기에 집중되었으며, 실제로 1995년 6월 빌 클린턴이 앨 고어 부통령과 함께 CNN의 앵커인 래리 킹과 대담을 나눴을 당시 그는 "전쟁 희생자 가운데 절반 가량인 13만명이 초기 1년 동안에 희생당했다."고 밝혔다.
결국 참다못한[23] 미국과 NATO는 보스니아 전쟁을 끝내기 위하여 공습을 시작하여 데이턴 협정을 체결시켰고 보스니아 전쟁을 종결시켰다. 그리고 이는 인도적 개입이라는 새로운 전쟁 개념을 창설하였다[24]
- 코소보 전쟁 - 보스니아 전쟁이 끝나고 3년뒤에 발생한 1998년 코소보 전쟁은 보스니아 전쟁과는 달리 미국이 빠른 시기에 개입하였기에 그만큼 피해가 크지 않았다. 그냥 대응을 빨리한 정도가 아니라 분쟁이 시작되자마자 국내외의 열렬한 지지를 등에 엎고 빠른 속도로 공습을 개시해서 실제 인종청소로 인하여 발생한 난민보다 공습으로 발생한 난민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이는 3년전 있었던 보스니아 전쟁의 실상이 점차 널리 알려지면서 미국과 유럽사회가 가졌던 트라우마를 자극하였기 때문이다. 다른 곳도 아닌 유럽에서 강력한 카리스마를 가진 독재자가 팽창주의적 극우 민족주의를 선동하면서 소수민족을 학살한다는 컨셉은 수십년 전 있었던 누군가와 어떤 사건을 떠올렸기 때문에 장기적으로 외교적, 평화적 해결책을 추구하는 의견은 어리석은 행동을 취급받았다. 실제로 당시 NATO의 공습을 지지하는 여론을 찾아보면 상당히 감정적인 면이 적지 않았으며 서구가 일으키는 다른 전쟁에 줄곧 반대했던 진보적 지식인들도 NATO의 코소보 전쟁만은 강도높게 지지하였다[25][26] . 이렇게 코소보 전쟁은 본래 방어적 개념이었던 NATO가 NATO와 무관한 국가를 위하여 NATO 권역 외에 위치한 국가를 선제적으로 공격한 대표적인 사례가 되었다. 후세의 비판도 다소 있는 편[27] . 그리고 러시아는 NATO가 NATO 가입국에 위협을 가한 사실이 없는 세르비아를, 그것도 러시아의 지원을 받는 세르비아를 폭격함으로써 러시아에게 적대하였다고 판단하였고 이후 NATO와의 협력관계를 점차 단절하고 만다#.
- 러시아 - 빌 클린턴은 러시아의 초대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과 만취한 모습으로 공식 석상에 등장한 모습으로 등장하여 시시덕대는 등 냉전시기 서로를 잡아먹으려 으르렁대던 국가의 수장답지 않게 사교적이고 친화적인 모습을 자주 연출하였다. 이 시기 클린턴과 옐친이 보여준 케미는 "보리스와 빌 쇼(The Boris & Bill Show)"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미국인들에게 탈냉전의 해빙 무드를 제대로 느끼게 하는, 클린턴 시대의 낙관적이고 희망적인 이미지로 기억되었다.
하지만 이는 냉전이 끝나 세계 전체에 영향력을 끼치는 초강대국자리에서 내려왔을 지라도 적어도 중앙유럽, 동유럽 내에서는 강력한 영향력을 끼치는, 최소한 역내 패권국이 되려고 했던 러시아의 내부 구상과는 어긋나는 것이었다. 결국 이 NATO의 동진이라는 사건은 러시아를 무시하고 러시아 영향력 내의 국가들을 NATO가 공습하는 사태(ex.코소보 전쟁)와 맞물려 러시아내 민족주의를 크게 자극하였고 미국 재무부, 세계은행 등 서방 기관들의 자문을 받아 실시한 보리스 옐친의 경제개혁(이른바 '충격요법')이 러시아 경제를 완전히 망가뜨리는 등의 실책이 연속되자 러시아 내부의 여론은 급격히 우경화 되어버렸다. 러시아 내에서 매국노로 낙인찍힌 보리스 옐친의 후임으로 등극한 블라미디르 푸틴은 2005년에 "소련 붕괴는 20세기 최대 지정학적 재앙"이라고 발언하여 화제를 모았는데 푸틴이 언급한 그 지정학적 재앙은 빌 클린턴 시대에 시작된 NATO의 동진을 말하는 것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푸틴을 대표로 우경화된 러시아 민족주의는 훗날 2014년 크림 위기를 불렀다. 이 때문에 미국의 정치전문매체 폴리티코(Politico)는 미국과 NATO에 대한 푸틴의 반응을 "복수(Revenge)"라고 부르면서 오늘날 2014년 크림 위기 등 동유럽에서 전개되는 러시아발 위협의 연원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결국 빌 클린턴이 추진했던 NATO의 동진정책에 그 뿌리가 있다는 지적을 하기도 하였다#[30][31] .
물론 빌 클린턴이 처음부터 나토 확장론자였던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임기 초인 1993년 6월 10일 NATO 외무장관들과 개최된 회의에서 미국의 대표로 나온 빌 클린턴의 국무장관 워렌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는 "언젠가 적절한 시기에 나토를 확장시킬 수는 있지만 현재의 의제는 아니다("In appropriate time, we may choose to enlarge NATO membership. But this is not now on the agenda.”)라면서 나토의 확장에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면서 나토의 확장보다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더 중요하다는 식으로 발언하였다. 나토의 확장은 자동적으로 우크라이나를 나토와 러시아간 완충지대(buffer)로 설정시키는데 이로 인하여 우크라이나의 비핵화가 무산될 수도 있기 때문이었다. 1994년 1월 11일에 개최된 백악관 각료들과 중부 유럽 외무장관들과의 회의에서, 러시아의 팽창에 큰 경계심을 가지고 있던 폴란드, 체코, 슬로바키아, 헝가리 외무장관이 나토에 즉각적으로 가입하고 싶다고 요청하였지만 백악관 각료들은 이에 대해 '러시아가 개혁에 성공해서 좋은 곰(good bear)이 될지, 아니면 팽창주의적인 나쁜 곰(bad bear)이 될지 지켜보자'면서 이들 국가의 나토 가입 요구를 거절하였다#. 이랬던 빌 클린턴 정부가 나토 확장론으로 급격히 기울게 된 원인으로는 폴란드나 체코, 헝가리[32] 등 이미 소련 시절 러시아에 호되게 당한 중부 유럽 및 동유럽국들이 러시아의 팽창주의에 대해서 엄청난 공포를 느끼며 끈질기게 NATO가입을 요구하였던 점, 보스니아 전쟁처럼 러시아의 관할권에 있다고 여겨지는 국가에서 발생한 전쟁과 대량학살(인종청소) 사태에 대해서 미국과 NATO가 무력하게 아무런 군사적 개입을 할 수 없었던 점과 해당 지역에서 영향력을 끼칠 수 있는 러시아는 오히려 뒷짐을 지면서 방치하거나 오히려 세르비아계를 지원하면서 간접적으로 민족학살을 부추겼던 점, 제1차 체첸 전쟁처럼 러시아와 그 주변국과의 갈등이 현실화되었는데 러시아가 이 갈등을 제대로 통제하지 못한 점, 1993년 12월 거행된 러시아 총선거에서 러시아 극우주의 정당인 LDPR가 최대 의석을 차지했던 점, 그리고 1994년 12월 실시된 미국 상원, 하원 선거에서 나토 팽창주의 정책을 추구하던 미국 공화당이 상원과 하원을 싹쓸이함으로써(이른바 '공화당 혁명') 나토 확장 정책을 펼치는 것은 미국 국내 정치권에서 거스를 수 없는 대세가 된 점 등이 꼽힌다#. 이런 미국의 요구에 가장 적극적으로 응했던 것은 독일의 수상 헬무트 콜이었다. 재밌는 점은 헬무트 콜 역시 처음에는 나토 확장론자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1994년 1월 개최된 나토 회의에서 헬무트 콜은 "동유럽국들에게 지원은 해줄 수 있지만 나토 가입은 허용할 수는 없다#"면서 공개적으로 나토 확장에 반대의사를 표했다. 하지만 그랬던 그도 보스니아 전쟁으로 인한 대량 인종학살과 그로 인한 난민 발생[33] , 보리스 옐친의 통제를 점차 벗어난다고 여겨지는 러시아 군부의 행각[34] , 러시아 팽창주의에 대한 위기감 등으로 빌 클린턴과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나토 동진 정책을 추진했다.
1985년~2019년 미국-중국간 교역 규모 출처
“중국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하면 우리 상품을 더 많이 수입하게 되는 것뿐만 아니라 민주주의의 가장 소중한 가치인 ‘경제적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다.”
- 빌 클린턴, 2000년 3월 존스홉킨스대 국제관계대학원(SAIS) 강연
- 중국 - 미국과 중국은 1979년부터 수교하였지만 양국간 경제적 거래나 교류 규모는 크지 않았다. 이에 덩샤오핑은 개혁개방을 통한 근대화 정책으로 점차 경제력을 키우고 있었는데 그러던 중 중국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사건 중 하나가 발생한다. 1989년에 발생한 천안문 6.4 항쟁이 바로 그것이다.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지지하였던 조지 H. W. 부시는 당시 중국에 항의하는 의미로 중국에 대한 투자와 수출입을 통제하는 조치를 발효하게 되었고 1992년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조지 H. W. 부시의 맞상대로 등장한 빌 클린턴 역시 중국을 압박하여 중국의 민주주의와 인권을 강화하겠다고 공약하였다. 그리고 대통령에 당선된 빌 클린턴은 공약에 따라 1993년 5월, 행정명령 12850호#를 발효하였는데 이는 천안문 6.4 항쟁 당시 시민 학살 책임, 티베트에서의 정치적, 종교적 자유 등 총 7개로 구성된 미국의 인권 개선 요구에 중국이 1994년 6월까지 유의미하게 응하지 않는다면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박탈하겠다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하지만 중국은 이에 응할리 없었고 빌 클린턴은 당초 제시한 시한이 다가오자 '중국의 인권과 경제는 별개'라는 입장으로 180도 돌아서면서 중국의 최혜국 대우를 그대로 유지하였다. 이에 더하여 1999년 빌 클린턴 행정부는 중국과 새로운 무역협정을 체결하였는데 양국간 무역장벽을 보다 완화시키는 이 협정은 중국과 미국간 관계를 항구적 정상무역관계(permanent normal trade relations)로 두는 것과 중국이 WTO에 가입하는 것을 조건으로 하였기 때문에 중국은 미국의 지원에 힘입어 WTO에 가입하였다###. 여기에는 당시 중국에 투자했던 미국 사업가들의 끈질긴 로비와 중국산 저가 수입품으로 인하여 미국의 물가가 안정되리라는 빌 클린턴 행정부의 계산이 있었다#, #[35] . '문제는 경제야'라는 빌 클린턴의 선거 구호가 결국 발목을 잡은 것이다.
- 멕시코 - 북미자유무역협정 체결 이후 멕시코 페소화의 가치가 급락하는 등 1995년에는 멕시코에 외환위기가 도래하였다. 이런 멕시코의 불안정함이 북미자유무역협정과 미국의 장래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고 예측한 빌 클린턴은 의회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약 200억 달러를 멕시코에 차관으로 제공하는 등 멕시코 외환위기 극복에 기여하였다. 하지만 당시의 경제적 불안과 북미자유무역협정이 보장한 역내 교역은 멕시코내 마약 카르텔의 세력을 급성장시켜[38] 결국 멕시코내 정치적 불안을 야기시켰고 도널드 트럼프로 대표되는 미국내 반이민 세력형성에 기여하였다.
- 쿠바 - 1966년 미국 의회가 채택한 쿠바 이민법(The Cuban Adjustment Act)을 개정하여 쿠바로부터의 정치적 난민 유입을 억제하였다. 1966년 제정된 쿠바 이민법은 미국의 영해에 진입한 쿠바 난민을 자동적으로 정치 난민으로 규정해 망명할 수 있는 권리와 1년짜리 영주권을 주는 법안이었는데, 빌 클린턴 행정부는 쿠바와의 협정끝에 1995년 이를 개정하여 '쿠바 난민이 바다(젖은 발)에서 미국 당국에 발각되면 난민으로 인정하지 않아 억류후 쿠바로 송환하고, 육지(마른 발)에서 미국 당국에 발각되면 난민으로 인정한다'는 이른바 '젖은발 마른발 정책(Wet feet, dry feet policy)#'을 발효시켜 쿠바와의 관계 개선에 노력하였지만 국내외적으로 많은 비판을 받았다[39] . 클린턴 행정부의 이런 관계 개선 노력에도 불구하고 1996년 쿠바 당국이 민간 비행기를 격추시켜 미국 시민 2명이 사망하는 사고가 발생하자 클린턴 행정부는 쿠바에 대한 제재를 추가하는 등 양국간 관계는 오히려 악화된다.
- 테러리즘 - 1998년 케냐, 탄자니아 미국 대사관이 폭탄 테러로 붕괴하자 이에 대한 보복으로 즉시 아프가니스탄과 수단 공화국에 순항미사일 공격을 가하여 박살내기도 했다. 이 테러사건의 배후가 바로 그 유명한 오사마 빈 라덴. 이때 미국의 추적망에서 벗어난 오사마 빈 라덴은 후일 9.11 테러을 일으킨다. 더불어 수단 공화국에 있는 화학무기 공장을 폭격하게 했더니만 그게 남수단의 유일한 아동 백신 제조공장이라서 많은 남수단 아이들을 죽게 한 일도 있었다. 이를 두고 자신의 성추행을 감추고자 일부러 그랬다는 비난을 들었다. 물론 이 공격으로 수단은 미국의 테러단체 지원 중단을 수용하게 되었다
- 이라크 - 전임자의 걸프 전쟁이나 후임자의 이라크 전쟁만큼은 아니더라도 이라크에 대해서도 별의별 이유를 들면서 심심하면 두들겨팼다. 비행금지선을 어겼다거나 쿠르드족 내전에 끼어들었다거나 UN조사관의 대량살상무기 조사를 방해했다거나(사막의 여우 작전)...가장 유명한 사례중 하나는 1993년 6월에 있었던 공습인데, 전임 대통령 조지 H. W. 부시의 1993년 4월 쿠웨이트 방문에 기해 이라크 정부가 조지 H. W. 부시 암살을 시도하였다는 첩보[40] 를 입수한 클린턴은 대통령 권한으로 바그다드내에 있는 이라크 정보기관 건물에 순항미사일 23발 발사를 명령한다. 그런데 이 중 3발은 바그다드내 민간인 주거지역에 떨어져 무고한 민간인 9명 사망, 12명 부상이라는 실책을 기록하였다. 이는 엄밀히 말하자면 국제법 위반이었지만 늘 그렇듯 유야무야 넘어갔다. 1998년 국회 연설에서 빌 클린턴은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의 대량살상무기 사용을 경고했다#. 훗날 이라크 전쟁으로 실현된 사담 후세인 정권 교체(regime change) 역시 1998년 빌 클린턴이 서명한 이라크 해방 법안(Iraq Liberation Act)에서 언급되었다. 다만, 이때의 이라크 해방 법안에서는 미군의 개입을 언급하지 않았다. 클린턴 정권 하에서 시행된 이라크 제재정책 역시 이라크 국내 경제, 보건 등의 영역에 타격을 줬다고 알려져있으나 구체적인 효과에 대해서는 설이 갈린다.
- 이란 - 이전 미국 행정부처럼 강도높은 제재와 압박을 이어갔다. 특히 1994년 이란을 가리켜 테러리즘을 후원하는 "불량 국가(rogue state)"#라고 불렀는데 이는 후임자인 조지 W. 부시보다 앞서 사용한 것으로서, 빌 클린턴은 미국 대통령중 해당 단어를 사용한 최초의 대통령이라고 알려져있다. 하지만 1996년 클린턴 정부는 과거(1988년) 미 해군 USS Vincennes가 이란 민항기를 격추시켜 이란인 254명이 사망한 사건에 대한 보상을 이란 정부에 공식적으로 하기로 결정하였고 1997년부터 시작된 클린턴 행정부 2기는 이란과의 관계개선을 모색한다. 하지만 이란 정부의 거부감이 여전히 심해 실질적인 진전은 없었다. 다만 클린턴 행정부는 식료품과 의약품에 대한 제재 일부를 철회하였고 국무장관 매들린 올브라이트를 통해서는 1953년 모하마드 모사데크 실각에 CIA가 개입한 사실과 미국의 후원을 받았던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정권이 정치적으로 억압적인 체제였음을 인정하기도 하였다.
- 일본 - 1980년대 레이건-부시 정부의 대일정책을 일본 때리기(Japan Bashing)로 요약할 수 있다면, 1990년대 클린턴 정부의 대일 정책은 재팬 패싱으로 요약될 수 있다. 실제로 미국의 일본 무시를 뜻하는 재팬 패싱이 이때 탄생한 말이다#. 클린턴이 집권을 시작한 1993년은 이미 1980년대 일본 거품경제가 붕괴되고 훗날 잃어버린 XX년으로 회자되는 일본의 디플레이션이 시작되던 타이밍이었는데 클린턴은 이에 아랑공없이 미국의 대일 적자를 줄이고자 보복 관세 등 다양한 압박을 하였고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와 갈등을 빚었다##.
- 북한 - 클린턴 정부 초기인 1993년부터 북한의 핵개발에 따른 1차 북핵 위기가 시작되었다. 클린턴 행정부는 초기에 강경한 이미지로 북한을 압박하였고 실제로 영변 핵시설 폭격까지 고려되었으나 이로 인하여 초래될 수 있는 남한과 미군의 막대한 희생때문에 해당 선택지는 제외되었다(출처 : 빌 클린턴 본인 자서전). 결국 클린턴 정부는 북한과 북미 제네바 합의를 체결하여 북한의 핵개발을 막으려 했으나 결과는 그리 좋지 않았다.
- 한국 - 집권 첫 해인 1993년에는 쌀 개방 파동 등의 여파로 농민/NL운동권 등지에서 방한 반대 시위까지 터졌고, 그렇게 한미관계까지 악화되어가는 중에 1997년 외환 위기가 터지자 미국은 한국의 IMF자금지원에 대해 통상 분쟁등을 이유로 한국에 대한 지원을 하지 않았다. 이에 더하여 클린턴 행정부의 로버트 루빈 재무장관은 IMF에서 미국이 가진 거부권을 이용하여 한국이 IMF의 관리조차 못받게 하여 디폴트 상황에 처하게 만들 생각까지 하였다. 자세한 건 1997년 외환 위기 참조. 이는 한국과 미국의 이익이 어긋난 대표적 사례로서, 한국은 미국이 주도하는 IMF가 한국에 대해 가혹한 구조조정을 강요당하면서 중산층까지 실직과 경제적인 어려움으로 고통을 당해야 했다. 그리고 이는 미국의 자본과 미국이 주도하는 국제 경제 질서에 대한 한국인의 신뢰를 부수기에 충분한 충격이었다[42] .
2.3. 퇴임 후[편집]
퇴임을 몇달 앞둔 2000년 백악관 공식만찬 행사에서 자신이 주연을 맡은 영상을 상영했는데, 제목이 Bill Clinton - The Final Days. 임기 말 레임덕에 빠진 대통령의 일상을 적나라하게 보여줘 호평을 받았다. 중간에 1999년 아카데미 시상식 남우주연상을 수상했던 케빈 스페이시가 오스카 트로피를 들고 거울 앞에서 수상소감을 읊어보는 대통령의 손에서 트로피를 뺏어가고, 힐러리가 클린턴이 챙겨준 점심까지 쌩까고 차타고 가버리는 장면과 당시 합참의장이던 휴 셀튼 미 육군 대장이 백악관 전쟁상황실에서 배틀십 보드게임을 하던 중 대통령이 셸튼 합참의장의 전함을 침몰시키자 셸튼 장군이 대통령에게 "You sunk my battleship!"하는 장면이 백미다.
퇴임 후에는 잘생긴 얼굴과 임기 중 얻었던 인기를 발판삼아 인기 강사, 연설가로 뛰고 있다. 사실 화술의 달인이기도 하다. 클린턴과 만나 10분만 이야기해보면 그를 까던 사람도 팬이 돼버린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오죽하면 "말이나 못하면 밉지나 않지." 라는 평가도 있다(특히 르윈스키 스캔들 당시). 은퇴를 해도 만 54세였다는 걸 상기할 필요가 있다. 클린턴 본인도 대통령을 너무 일찍 그만둔 게 아쉬웠는지 국민들이 원하고 능력이 있으면 2회의 임기를 마친 뒤에도 어느 정도 시간을 거쳐 대통령을 다시 할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 물론 헌법 개정 과정이 험난하기로는 최고인 미국인지라 자신 대신에 아내인 힐러리를 대통령으로 밀어줬다.
미국 내부에서의 평가들도 너무나 젊은 나이에 정치적으로 모든 것을 다 했다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30살에 아칸소 주의 검사총장이 되고, 32살에 아칸소 주지사에 당선되고 나서 사실상 30대와 40대를 주지사로 지내다가 40대 중반에 바로 미국 대통령이 되어서 55살에 퇴임했으니 이건 무슨 일반 회사원이 회사 다니다가 정년 퇴직한 것도 아니고 50대에 정계 진출하는 사람들도 많은데[43] 이 사람은 50대에 이미 모든 정치 활동을 끝냈다.[44]
허리케인 카트리나 피해자들을 위로하러 방문했을 때도 현직 대통령인 부시보다 더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리고 퇴임 후에도 사람들한테 인기가 많아서 보수 쪽 미디어에서 비아냥거리는 논조로 MTV 대통령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이 대통령 선거 때 정치자금 때문에 진 빚을 갚기 위해 부지런히 여러 강연에 나가기도 하며 활동한 덕에, 빚 수백만 불을 고작 5년 만인 2013년 초에 다 갚았다. 이쯤 되면 얼마나 인기가 많은지 실감이 나서 무서울 수준.[45]
2004년 미국 대통령 선거 당시 민주당 전당대회에서 대통령 후보로 지명된 존 케리를 지지하는 영상. 당시 빌 클린턴 전 대통령의 인기와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연설이다.
클린턴 재단이라는 자선재단을 운영하고 있다. 2005년 9월에 첫 모임을 열었는데, 적대적 세계보다는 협력의 세계를 만들고 세계적 상호의존의 부담을 줄여 더 나은 미래를 만들자는 명확한 목적이 있다. 실제로 2006년에 버진 그룹[46] 의 수익 30억 달러를 지구 온난화 문제에 쓴다는 약속[47] 을 비롯한 73억 규모의 215개 약속을 이끈 바 있으며, 카네기 국제평화재단 연구원 로스코프는 현시대에서 가장 영향력이 강한 집단이라고 평가했다.[48]
2009년 미국 기자 북한 억류 사건 당시 8월에 자국의 여성 기자의 석방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북한을 직접 방문하여 기자들을 미국으로 데려오는 데 성공했다. 또한 북한에게 현대아산 직원과 연안호 선원들의 조속한 석방을 요청했다고 알려졌다. 이것이 공식적으로는 미국 정부와는 무관한, 자연인 클린턴으로서의 개인적인 활동으로 되어 있으나, 부인 힐러리 클린턴이 당시 국무부 장관이었으며, 그 자신이 전직 대통령임을 감안하면 단순히 석방을 위한 협상만 하진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
2010년 아이티 지진의 구호활동에도 나섰는데 그해 2월 12일 심장에 통증을 호소하며 뉴욕의 어느 병원에 입원했다. 2004년에 심장 문제로 수술을 받은 전력과 관련이 있는 듯하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 가서 미국의 조예선 마지막 경기를 관람했는데 랜던 도노번의 극적인 인저리타임 골로 자국이 16강에 진출하자 매우 흐뭇해하는 광경도 보였다.
2012년 민주당 전당대회에 나타나서 오바마 지지 연설을 하면서 화제가 되었다. 이후 대선이 박빙으로 흐르면서 오바마가 클린턴에게 지원을 요청하자 이에 응해 격전지인 스윙 스테이트들을 돌면서 오바마 지지를 호소했던 것. 여전히 민주당 정치인 중에선 가장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정치인이라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하든 밋 롬니가 당선되든 클린턴이 최후 승자일 거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오바마가 재선에 성공할 경우 전직인 그를 배려하지 않을 수 없어서 민주당에서 지분이 높아지고, 롬니가 당선되더라도 야당이 된 민주당의 원로 정치인으로 민주당의 간판이 될 가능성이 높다는 해석. 심지어 클린턴이 부인 힐러리의 대선 출마를 고려해서 오바마를 지원했다는 이야기까지 나올 정도였다. 그리고 오바마의 재선 이후 힐러리의 인기는 계속 오르고 있다. 반면 공화당에서는 그나마 낫던 롬니가 잘리고 나서는 현재 누구를 올려야 할지 고민할 정도로 막장이 되었다.
그리고 영부인이었던 힐러리 클린턴이 대선에 출마한다고 발언한 이상, 힐러리가 대통령에 당선된다면 빌은 前 대통령이자 現 대통령의 부군이 되는 셈이다. 참고로 이런 경우를 위해 영부인(First Lady)와 대등되는 First Gentleman이라는 단어가 있지만 대통령의 남편에게는 한 번도 쓰인 적은 없었다.[49] 빌 클린턴이 최초로 대통령 남편으로서의 First Gentleman이 될 수도 있는 셈이다.
힐러리가 대선에 출마하겠다고 선언하자 남편 빌도 전국을 돌며 유세를 도왔다. 여담으로 "아내는 내가 바람피웠을 때도 날 포기하지 않은 사람이니 여러분 역시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는 자조적인 지지연설과 힐러리를 적절하게 잘 띄워준 말솜씨 덕에 언론과 좌중의 찬사를 받았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걸(언론의 포장과 전통적 블루 스테이트라는 점에 가려져) 보지 못해서 발생한 러스트벨트 문제, 힐러리 클린턴 자신의 이메일 스캔들, 이라크&리비아의 수렁, 월가 문제 등이 겹쳐 예상 외의 패배를 당하며[50] 클린턴 부부 대통령의 꿈은 좌절되었다. 아내 힐러리도 이젠 나이가 있고 정계 은퇴가 확실하기 때문에 빌도 그냥 전직 대통령으로만 남게 되었다. 빌은 노동자 계층과 경제를 무시하지 말라는 조언을 했지만 힐러리가 듣지 않았다는 이야기가 있다. ###
그런데 도널드 트럼프가 그를 자문역으로 고려 중이라고 한다. 클린턴 가족의 사이가 공화당과 그리 좋지 못함을 감안할 때 공화당 입장에선 이게 성사되면 매우 충격적인 일이 될 듯. 그러나 트럼프가 대통령에 취임한 뒤에도 별다른 소식이 없는 걸 보면 결국 무산된 것으로 보여진다.
# 힐러리 클린턴 대선 출마 당시 민주당 성명에서 빌 클린턴이 홍보용 풍선을 가지고 즐거워하는 게 재밌다는 반응이 생기고, 한 소녀에게 풍선을 뺏기기 싫어하는 모습이 밈화되었다.
2018년 북미정상회담이 가까워지자 회담의 성공을 기원하면서 민주당과 리버럴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있다.
한편 심장 수술을 받은 것을 계기로, 아예 육식을 중단하고 채식주의자가 되었다.
2018년 미국 우편 폭탄 미수 사건에서 그의 집으로 파이프 폭탄이 배달되었다.
2019년 5월 딸 첼시 클린턴과 정치 팟캐스트 방송을 시작하였다.
2020년 12월 14일, 당해 치뤄진 미국 대선의 뉴욕 주 선거인단으로서 아내인 힐러리 클린턴과 함께 조 바이든과 카멀라 해리스에게 투표를 했다. 그리고 바이든-해리스 러닝메이트가 트럼프-펜스를 누르고 당선되면서 4년전의 복수를 간접적으로나마 이뤄냈다.
2021년 10월 15일, 패혈증 의심 증상으로 미국 캘리포니아주 어바인에 있는 중환자실에 입원했다고 CNN 방송이 보도했다. #